[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이전과는 다른 제 얼굴이 나왔다고 생각해요, 직접 설명하기는 어렵지만요.” 영화 <하얼빈>에서 안중근 장군으로 관객 앞에 선 배우 현빈의 말이다. 새로운 자기 얼굴을 발견했다는 현빈과 마찬가지로 대중 역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안중근을 만날 수 있는 <하얼빈>. 현빈은 고뇌하고 좌절하면서도 다시 일어서서 나가는, 영웅이기에 앞서 인간 안중근을 표현했다. 준비 단계부터 안중근 세 글자가 지닌 존재감과 상징성으로 인해 항시 압박감을 받았고, 지금 또 다시 압박감을 느낀다는 현빈을 만났다. 최선의 노력이 최선의 결과를 담보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다짐하며 묵묵히 연기의 길을 걷고 있다는 그이다. 자기 중심의 삶에서 결혼과 출산을 거쳐 자기보다 더 우선인 존재인 아내와 아이라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현빈의 말을 들어본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2019)으로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안중근 역할을 맡는데 우려는 없었나.
주변에서 우려를 표한 분은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작품이겠다 싶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대중과 만난다면, 바쁜 일상에서 잊고 살았던 선열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다시금 환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중과 친근한 매체인 영화를 통해 한 번쯤 역사를 돌아볼 계기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싶었다.
<하얼빈>의 어느 면에 끌렸는지.
우민호 감독님은 우리가 알던 안중근 장군과 하얼빈의 거사보다는 그 거사를 치르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싶어하셨다. 독립투사 이면의 장군은 어떨지를 담고 싶어 했고, 나 역시 이 부분에 흥미를 느꼈었다. 거사의 성공이라는 시원한 결말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계속 걸어 나가야 할 여정의 밑거름과 그 메시지에 대한 영화, 기존 콘텐츠와는 목적과 방향성 자체가 달라서 좋았다.
근현대사에 있어 워낙 존재감과 상징성이 큰 인물이라, 연기하면서 압박감과 부담감이 상당했을 것 같다.
정말 그렇다. 결국 촬영 끝날 때까지도 극복 못 했었다. 촬영 당시는 상상 이상으로 압박감이 컸었다. 크랭크업 이후에야 벗어났고 다른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개봉하게 되니 또다시 짓누르는 무언가가 있다. 말한 대로 워낙 상징성과 존재감이 큰 분이라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끝까지 잘 해낼 수 있었던 건 동료 배우들과 감독님 스탭들 덕분이다. 모두가 의미있는 작품에 참여한다는 공통의식이 있었고 이로부터 큰 힘을 얻었다.
실존 인물을 연기하면서 경계 혹은 유념한 부분이 있다면.
안중근 장군이라는 각자가 지닌 이미지에서 너무 벗어나도 안되고, 그렇다고 다큐멘터리도 아니기에 너무 사실에만 충실해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경계를 찾아내는 일이 관건이었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상상하며 인물을 알아갔었다. 몇 달 동안 준비하고 촬영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매일 생각했는데 정말 그분의 발톱도 따라갈 수 없겠더라. 안중근 장군이 당시 서른 살 무렵인데 그 나이 때의 나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범주의 일을 하신 분이라…. 흉내라도 내려고 애썼던 것 같다.
가볍게 묻자면, 실제 그 나이 때 어떻게 지냈었나.
아, 서른 살부터 서른 한살까지 군복무 중이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 끝나고 입대했거든.
인간 안중근을 조명했는데 특히 이러한 모습이 담긴 장면을 꼽는다면. 개인적으로 ‘최재형’(유재명)과 대화하는 씬이 인상 깊었다.
<하얼빈>은 안중근 장군이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하기까지 인간으로서의 뒷모습을 담고 있다. 신아산 전투 후, 자기의 결정으로 동료를 잃은 결과에 고통받고 좌절하고 그 이후에도 심적으로 매우 괴로운 상황의 연속이 아닌가. 그래서 안가 안에서 홀로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 있고, 때론 눈물도 흘리곤 한다. 언급한 그 장면은 안중근 장군의 가장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씬이라 고민이 많았었다. 용맹한 리더라기보다 불안에 휩싸인 한 인간이라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피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려 했다. 그 공간의 공기를 느끼고 표현하기 위해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냈었다. 원래는 의자가 있고 그 의자에 앉아 최재형 선생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는데, 의자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또 구석진 곳에 몸을 숨기듯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려서 지금의 장면이 탄생했다.
신아산 전투 촬영 당시 폭설이 내려서, 하늘도 촬영을 도왔다고. (웃음)
광주 어느 산에서 찍었는데 정말 몇십 년 만에 폭설이 온 거였다. 원래 눈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지. 촬영장까지 진입하기 위해 몇 날 며칠 스탭들이 고생해서 제설 작업을 하며 루트를 개척하고 올라갔는데 정말 온통 세상이 눈밭이었다. 영화에서 나온 눈과 바람, 모래 등은 전부 실제의 것으로, CG의 도움을 받은 부분이 전혀 없다. 눈이 그치면 다시 눈이 오길 기다리면서 촬영했는데 운이 좋게도 필요한 순간 눈이 많이 와줬었다. 신아산 전투의 경우, 눈밭이 진흙밭으로 변해, 촬영 직전 액션 수정을 많이 했었다. 멋있는 액션이 아니라 처절한 몸부림으로 보이길 바랐기 때문에 테이크에 맞게 가다듬으며 촬영했다. 한 열흘 정도 꽤 오래 찍어서 나온 시퀀스였다.
얼어붙은 강 위를 홀로 걸어가는 뒷모습의 오프닝은 영화의 백미 중 한 장면이 아닌가 한다. 어떤 심정으로 임했을까.
촬영 장소에 대해 들었던 것보다 막상 가보니 광활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IMAX 버전으로 보니, 그 느낌이 잘 전달되어 좋더라.(웃음) 얼음 두께가 1미터 이상이라 차량으로 이동이 가능할 정도였다. 현장까지 차로 이동해서 베이스캠프에 촬영 장비와 인력이 내린 후, 나 홀로 걸어가야 하는데 처음에는 좀 공포감이 있었다. 얼음 위에 서있으면 실제로 희한한 소리가 나서 기분이 묘해진다. 이 소리가 음악 사운드에 같이 믹싱되어 녹음된 거로 알고 있다. 정말 끝도 없이 얼어 있는 빙판길과, 그 빙판길 끝에 보이는 몇 개의, 산. 당시 독립군들이 끝도 없는 길을 한 발 한 발 내디뎠다고 생각하니 그 길이 얼마나 지금의(촬영 중인) 나처럼 고독하고 외롭고 추웠을까 싶었다.
다들 너무 추운 모습이던데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서 더 차가운 정서를 증폭했지 않나 싶다. 실제 날씨는 어땠는지. 이번에 전에 없던 새 얼굴을 본 느낌인데 개인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장의 힘도 있지만, 정말 추웠었다. 듣기로는 영하 40도까지 육박한 적이 있다고. 그런데 춥기는 하지만, 너무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오히려 방해 요인보다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서, 추위는 뒷전이었다. 스스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전에 없던 얼굴을 보이지 않나 싶다. 아마도 관객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한다.
처음부터 대립각을 세우는 ‘이창섭’ 역의 이동욱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안중근과 이창섭은 서로 방식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다고 생각한다. 안중근 장군은 군인으로서 만국공법에 따라서 포로를 살려 보낸다. 이창섭은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각자의 서사와 배경을 지닌 사람이 모여서 앞으로 나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본다. 운이 좋았던 점은 몽골 촬영부터 시작해서 타지에서 의미있는 작품을 만들면서 동료들과 깊게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안중근에 대한 압박감이 컸는데 이는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더라. 이러한 감정을 공유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누구보다 더 많이 의지했었다.
이창섭은 안중근을 ‘고귀’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고귀에 담긴 의미는 무얼까.
가족보다도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분.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앞으로 나아가고, 그 와중에 평소의 신념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밀정의 정체를 알고 난 후 분노보다는 슬픔의 감정이 강해 보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인상도 들더라.
그때의 감정이 그랬던 것 같다. 서로에게 목숨을 맡기고 거사를 도모하는 상황에서 동지의 배신에 분노감이 없지는 않겠지만, 안중근 장군은 그보다는 아픔이 더 컸을 것 같더라. 그래서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 척결 성공 후 ‘까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칠 때의 마음은 어땠나. 또 마지막 사형대에서 머리에 보자기를 쓰니 무슨 생각이 들던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그 소리가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기했었다. 계속 소리를 지른 것은 적들에게 잡힌 안중근 장군의 얼굴보다 ‘까레아 우라’라는 소리가 귀에 박혔으면, 더 많은 사람한테 전달되고 더 많은 사람이 알아듣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서였을 것이다. 극 중 사형대는 실제로도 매우 높았다. 뚜벅뚜벅 철판 위로 올라가는데 그 울림만으로 약간의 공포심이 생길 정도였다. 보자기를 뒤집어쓰기 전부터 만감이 교차하는데 두려움 마음 한편으로 미안함도 존재했을 거다. 고난과 역경이 끝나지 않은 상황인데, 자신 아닌 누군가는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하는 형국에서 혼자만 쏙 빠진다는 느낌이 들었을 거로 봤다.
안중근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현 시국을 연상시킨다는 시선이 많다.
안중근 장군의 마지막 내레이션도 그렇고 이토 히로부미의 대사도 그렇고 실제로 했던 말을 각색한 것이다. 현 시국이 시국인지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데, 이러한 시국을 떠나서도 유효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과거도 또 미래에도 어려움에 직면할 상황이 생길 것이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용기를 잃지 않고 이겨낼 것이라 생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2018) 등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명인 릴리 프랭키가 이토 히로부미로 출연했다. 직접 맞붙는 장면은 없지만, 현장에서 그는 어떤 분이던가.
그간 팬의 한사람으로 작품을 많이 봐왔었다. 이번에 현장에서 보고 놀라웠던 부분 중 하나는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에도 불구하고 그 뿜어내는 에너지가 엄청나다는 점이었다. 표현 방법이랄지 연기 포인트가 굉장히 편안하면서도 힘이 있더라. 연기 외적으로는 너무 좋은 분이셨다. <하얼빈>에 참여해 준 데 대한 감사함도 컸고, 무대인사할 때도 뵀는데 의미있는 작품을 함께해서 너무 좋았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나중에 <하얼빈>이 일본에서 개봉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가서 무대 인사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었다.
이번에 예능 <유퀴즈>에 출연했다. 결혼과 출산 이후 처음인 것은 물론이고 무려 17년 만의 예능 출연이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더라. 원래 이야기를 하기보다 듣는 편이고 특히 방송에서 내 이야기를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자제해 왔는데, 이번에 나가게 됐다. 우선은 영화 홍보 때문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나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한 번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평소 나에 대해 궁금해하셨던 분들이 내 색다른 모습을 좋아해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다행히 유재석, 조세호 두 MC 분과 같은 피트니스를 다녀서 오고 가며 친분이 있었고, 두 분의 뛰어난 리드 덕분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웃음)
촬영 중에 아빠가 되었다. 전후로 변화가 있다면.
<하얼빈> 고사를 지내고 다음 날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난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특히 생각과 역할에 있어서 그렇다. 그간 내 중심으로 살았다면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삶의 중심이 된 것이니 말이다. 아이와 아내가 내 삶의 공동 일순위다.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음… 내 상황에 대해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인 것을 표현하려고 나름 노력하고 있다. 위의 ‘유퀴즈’ 출연도 그 연장선이 아닌가 한다. 20대와 30대에 일하면서 스스로에 가시가 돋았다면 그런 것들을 없애려고 하고 있다. 또한 표현을 해야 상대방이 안다는 걸 느끼고 있어서 표현하고자 한 발 한 발 노력하고 있다.
늘 그런 것 같다.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최선의 결괏값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서 있는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은 성공 여부를 떠나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런 생각으로 프로젝트에 임하고, 또 그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 내 끝은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다음에는 어떻해서든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리려 한다.
<하얼빈>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나.
개인적인 바람은, 우리에게 어떤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용기내고 묵묵히 걸어가다 보면 보다 나은 내일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전달되었으면 한다. 또 우리가 평안한 일상을 영위하기까지 독립투사를 비롯해 많은 분의 희생이 있었음에, 나 역시 그랬듯이, 감사하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차기작 소개를 부탁한다.
1월 초까지는 <하얼빈> 홍보와 동시에 시리즈 <메이드 인 코리아>를 열심히 촬영할 것 같다. 우민호 감독님의 작품인데, <하얼빈>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라 매우 흥미로워서 재미있게 찍고 있다. 2025년 하반기에 찾아뵐 거 같다.
사진제공. CJ ENM
2024년 12월 31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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