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오락영화로 만들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제작비 300억 원 손익분기점 650만 명의 대작을 만들면서 우민호 감독의 의지는 확고했다. ‘묵직하고 우직하게, 숭고하고 클래식하게’ 안중근 의사와 그와 뜻을 함께했던 수많은 독립군의 하얼빈으로의 여정을 담아내고 싶었다. 오락성의 배제는 거대 자본이 투입된 영화를 연출하면서 모험이자 도전일 수 있다. 이에 우민호 감독은 말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제작사, 투자배급사 그리고 참여한 모든 배우들의 의견이 합치한 결괏값이라고. 캐릭터의 자극적인 묘사와 신파적인 요소 역시 지양하여 마음속 울림을, 여운을 길게 가져가고 싶었다는 우민호 감독을 만났다. 음악과 영상이 특히 뛰어난 <하얼빈>을 통해 광활한 대지에 발을 붙이고 한계에 도전했던 독립투사들을 스펙터클하고 웅장하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안중근을 다루게 된 계기 혹은 기획 의도는.
우연히 안중근 장군의 자서전을 읽었고, 신아산 전투에 대해 알게 됐다. 당시 30세인 그는 내가 알던 영웅이 아니라 자책감에 괴로워하는 한 인간이더라. 그 모습을 보면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까지, 하얼빈으로의 여정이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또 하나는 ‘절대 포기하지 말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말이 개인적으로 위로와 힘으로 다가왔었다. 내가 받은 이 감정을 많은 관객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하이브미디어코프에서 ‘하얼빈’이라는 대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고, 김원국 대표에게 물어보니 감독은 아직 미정이라고 하더라. 글을 볼 수 있겠냐고 요청드려 읽어 보니, 오락적인 케이퍼무비에 가까워서 글을 새로 쓰기로 했다. <하얼빈>은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안중근 장군의 이야기라 오락영화로 만드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하나도 없었다. 묵직하게 가고 싶었다.
인간 안중근의 여정을 담으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혹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을까.
여러 번 있었다. 그 시대의 공기를 잘 모르겠더라 어떻게 담아내야 할지 고민하던 중 아내가 잠시 쉬면서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읽어 보라고 하더라. 그 시대를 담고 있고 간도 지역 독립군의 활동상이 나와 있어서, 토지를 보고서야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민족의 생명력은 모질고 질기다는 걸, 짓밟히고 짓밟히면서도 살아남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대사가 극 중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의 대사로 나오지 않나. ‘왕과 유생들은 하나도 안 무서운데 저잣거리의 민초들이 무섭다’고… 조사해 보니 실제로 이와 같은 말을 했었더라.
영화적 재미를 높이기 위한 연출을 자제한 인상이다.
안중근과 독립투사들의 발자취처럼 우직하게 가고 싶었고 묵직한 톤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래서 빠른 편집을 지양했고 숏도 적은 편이다. 보통 영화 현장은 카메라를 3대 돌리는데 우린 폭발씬을 제외하고는 한 대의 카메라로만 찍었다. 컷을 많이 안 나누고 그룹샷 위주로 해서 누군가가 두드러지기보다 정적인 느낌의 군상화처럼 보이길 바랐다. 마지막 총을 쏜 이는 안중근 장군이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동지들의 희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실화를 다루면서 경계한 점이나 집중한 부분은.
캐릭터를 비롯해 이야기를 자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또한 모든 캐릭터에 있어서 신파적인 요소도 배제하고 싶었다. 마음속에 울림이 전해지고 그 여운이 오래 남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손익분기점이 650만 명으로 매우 높다. 신파적이고 오락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것은 그만큼 모험이자 도전일 수 있는데…
남들이 안 했던 방식으로 도전해 보고 싶었다. 이건 나만이 아니라 제작사, 투자배급사, 그리고 배우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블록버스터의 공식을 따라간다고 해서 흥행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니까, 원래 의도대로 묵직하고 진중하게 가고자 했다. 동토에서 활동한 독립군의 모습을 대자연과 함께 담고 싶었다. 나라를 잃고 이국에서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초라하고 쓸쓸하게 보일 수 있지만, 목적을 위해 하얼빈으로 가는 여정이 숭고하게 느껴졌고, 이를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싶었다.
안중근 역에 현빈 배우를 캐스팅한 까닭은. 수락할 때까지 러브콜을 보낼 생각이었다고. (웃음)
내가 그린 안중근 캐릭터는 영웅 안중근이 아니라 고독하고 번뇌하고 그러면서도 확고부동한 모습이었다. 현빈 배우의 눈빛에서 이런 감정이 읽혔었다. 처연, 따뜻함, 유약함, 강함 그리고 누구도 꺾지 못할 기개를 보았는데 처음에는 거절하길래 계속 글을 보냈었다. (웃음) 될 때까지 부닥쳐볼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이내 수락해줬다.
초반 신아산 전투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독립군과 일본군이 뒤엉켜 싸우는 모습이 전투보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보일 지경이다. 촬영 당시 실제로도 눈이 많이 왔다고.
원래는 눈이 없는 전투씬이었는데 마침 촬영지인 광주에 50년 만에 폭설이 내렸었다. 홍경표 촬영 감독과 함께 눈과 빛 모두 자연 그대로 담아 현장감을 살리자 해서 제설작업을 한 후 촬영에 들어갔다. 우리 주권, 자유, 땅 나아가 그 땅에 살고 있는 동물과 식물 모두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빼앗긴 상황에서의 전투라 도저히 통쾌하게 찍지 못 하겠더라. 전투 자체가 비극적이고 처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깊숙이 가까이 들어가서 인물 중심으로, 아군과 적군의 피아 구분이 안 되도록 뒤엉켜 싸우고 있는 모습을 찍었다.
설산, 얼어붙은 강, 사막 등 대자연을 IMAX 비율로 촬영했는데, 영상에 특히 힘을 준 까닭은. OTT 콘텐츠와 차별화를 위해서일까.
그런 부분도 있다. 극장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비주얼, 음악과 사운드에 심혈을 기울였다. 요즘 숏폼 등 빠르고 짧은 콘텐츠에 익숙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고전적으로 시네마틱하게 찍으려 했다. 이런 방식이 당시의 안중근 장군과 독립군을 담아내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얼빈>에서 등장하는 눈은 가짜 눈이나 CG 작업한 눈이 하나도 없다. 촬영에 맞춰 눈이 계속 내려줘서 신기했다. 심지어 제작발표회 때도 눈이 많이 내려서 신기했을 정도! 대자연 장면은 한국영화 최초로 IMAX 비율로 촬영했다. 말했듯이 광활한 대지의 독립의사들을 스펙터클하고 웅장하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였다.
극 중 등장하는 밀정의 존재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은 바는.
<하얼빈>의 밀정은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 배우와는 다른 밀정이라고 생각한다. <암살>의 밀정이 자기 욕망과 성공을 좇아 변절했다면, <하얼빈>의 밀정은 저항했지만, 거대한 폭력 앞에 어쩔 수 없이 무릎 꿇은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단지 살고 싶었다고 하지만 변절하는 순간 이미 자긴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걸 아는 약한 인물이다. ‘모리’(박훈)가 주는 고깃덩어리를 집어먹지만, 존엄성은 완전히 바스러진 채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한 인간. 두려움에 굴복했지만 그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밀정이 밝혀지는 기차 씬은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데, 흔들리는 화면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홍경표 촬영감독과 이야기해서 만든 장면이다. 기차의 흔들림을 그대로 담고 싶었다. 사실 기차는 흔들리고 있는데 그 흔들림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 촬영감독: 홍경표)가 거의 유일하게 그 흔들림을 표현한 영화인데, 우리도 한 번 해보자 했다. 기차가 흔들리면서 밀정의 정체가 밝혀지는 걸 시각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유난히 담배 피우는 장면이 많다.
그 당시에 실제로 많이 피었다고 하고, 고독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다. 항상 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도록 의도했다. 하다 보니 담배 연기가 여백을 채워주는 부분이 있더라. 연기가 연기한다고 할지!(웃음)
오프닝은 안중근 장군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엔딩은 걸어오는 앞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안중근 장군이 걸어오는 마지막 엔딩을 좋아한다. 오프닝과 수미상관이라 하겠는데 오프닝은 실패한 장군의 뒷모습을 담고 있다. 계속 가야 할지, 포기해야 할지 방황하고 있다면, 안중근이 카메라로 다가오는 엔딩은 뒤에 동지들이 같이 있는 느낌이 나도록 연출했다. 엔딩에서 장군이 하는 대사는 남은 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비록 떠나지만, 향후 더욱더 엄혹한 시기가 올 것이고, 저항이 거세지면 폭압 역시 거세질 테니 말이다. 이 때 그 얼굴은 승리의 얼굴이 아니라 후대를 걱정하는 얼굴이라 하겠다.
전여빈 배우가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공부인’ 역을 맡았다. 어느 면을 보고 캐스팅했는지.
영화 <죄 많은 소녀>(2017)를 보고 한 눈에 들어왔었다. 이후 드라마 <빈센조>에서 한복입고 나온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리더라. 강단있고 우아하고 품격있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표상으로 제격이다 싶었다. 더불어 아내가 전여빈 배우의 빅팬이다. (웃음)
‘이토 히로부미’ 역의 릴리 프랭키 섭외가 어렵지는 않았나. 또 함께한 소감은.
사실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우리나라에도 팬층이 있고 일본에서도 워낙 대배우기도 해서 마음은 간절했지만, 솔직히 힘들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내 전작인 <내부자들>과 <남산의 부장들>을 재미있게 봤다고 하시더라. 처음 볼 때 조용한 카리스마와 아우라가 느껴지더라.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에서는 위인이라고 하는데 전혀 개의치 않고 연기해 주었다. 또 한국을 너무 좋아한다. 특히 블랙핑크를 좋아하고, 게다 뉴진스 문제까지 걱정하시더라. (웃음)
2025년은 을사년이기도 하고, 극 중 안중근 장군의 마지막 대사가 탄핵정국과 맞닿는다는 시선도 있다. <하얼빈>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나.
안중근 장군의 말씀이 개인적으로 크게 다가와서 출발한 작품인데, 어쩌다 보니 이런 시국과 맞물리게 되면서 해석할 여지가 많지 않나 싶다. <남산의 부장들>은 설날에 개봉하고 며칠 뒤 코로나가 터졌고, 4년 만의 신작인 <하얼빈>은 계엄 이슈가 불거져서 깜짝 놀랐다. 전주에서 밤새 촬영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끔찍하고 참담하고 이게 말이 되냐 싶었다. 그때 느낀 점이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가 또 반복될 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역사를 되짚어 봐야 하고, 이런 시대극이 명맥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제공. CJ ENM
2025년 1월 15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